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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LAH STORY 003

일곱 시의 초대

하루를 버틴 뒤 익숙한 위로를 찾던 윤희는, 뜻밖의 산책 초대 앞에서 다른 쉼의 가능성을 만난다.

저녁 현관 문턱을 사이에 두고 마주 선 두 여성

윤희는 사무실 건물의 자동문을 빠져나오며 목도리를 느슨하게 풀었다.

빠진 숫자를 찾아 보고서를 고치고, 고객의 항의 전화를 넘겨받고, 신입사원의 마감까지 챙겼다. 퇴근 버튼을 누른 뒤에도 엘리베이터 거울 속 얼굴은 아직 업무 중인 것처럼 굳어 있었다.

지하철을 빠져나오자 저녁 공기가 뺨에 닿았다. 집까지는 십 분 남짓이었다. 걷는 동안에도 머릿속에서는 내일 아침 해야 할 일들이 좀처럼 흩어지지 않았다.

아파트 입구에서 옆집 아주머니와 마주쳤다. 운동화 차림에 얇은 점퍼를 걸치고 있었다.

“윤희 씨, 나 저녁마다 한 바퀴 걷는데 같이 갈래요?”

윤희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좀 피곤해서요. 다음에요.”

현관문을 닫고 나서야 어깨가 아래로 떨어졌다.

“아, 오늘도 잘 버텼다.”

불을 켜자 조용한 집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식탁 위에는 아침에 마시다 둔 물컵이 있었고, 소파에는 어제 벗어놓은 카디건이 구겨져 있었다.

가방을 내려놓은 윤희는 냉장고를 열었다. 반쯤 남은 와인병이 문 안쪽에 서 있었다. 월요일에 열면서 이번 주에는 한 잔만 마시겠다고 했던 병이었다.

싱크대 아래에서 빈 병 하나가 가볍게 부딪혔다.

그 정도는 아무 일도 아니었다. 출근을 못 한 적도 없었고, 술에 취해 누구에게 실수한 적도 없었다. 오늘처럼 오래 버틴 날에는 이만한 쉼도 없었다.

윤희는 병과 잔을 꺼내 소파 앞에 놓았다. 리모컨을 누르자 보던 드라마가 멈췄던 자리부터 시작됐다.

첫 모금을 넘기기도 전에 휴대전화가 울렸다.

‘팀장님, 수정한 자료는 내일 아침에 보여드릴게요. 오늘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저녁 꼭 챙겨 드세요.’

신입사원이 보낸 문자였다.

윤희는 한동안 화면을 바라보다 휴대전화를 뒤집어 놓았다.

“오늘만은 아무도 챙기지 말자.”

등을 소파 깊숙이 묻었다. 화면 속 사람들은 웃다가 울었고, 갈등은 음악과 함께 빠르게 지나갔다. 잔이 반쯤 비자 머릿속의 목소리도 조금씩 멀어지는 것 같았다.

한 편이 끝났다.

곧바로 다음 편이 재생됐다.

그런데 어깨는 여전히 단단했고, 저녁을 먹지 않은 배에서는 작게 소리가 났다. 윤희는 소리를 듣지 못한 척 와인병을 들었다. 잔을 다시 채우려는 순간 초인종이 울렸다.

문을 열자 아까 마주쳤던 옆집 아주머니가 서 있었다.

“나 지금 나가려는데, 십 분만 걸을래요?”

윤희의 시선이 소파 위 잔으로 향했다.

“저, 지금 좀 쉬고 있었는데요.”

“그럼 안 나와도 돼요.”

아주머니가 계단 쪽으로 몸을 돌리다가 덧붙였다.

“사실 혼자면 나도 자꾸 안 나가게 돼서 그래요.”

복도에 잠깐 침묵이 머물렀다.

윤희는 현관 안쪽의 구두와 운동화를 번갈아 보았다. 소파에서는 드라마 속 대화가 계속 흘러나왔다. 지금 문을 닫으면 누구도 뭐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잠깐만 기다리세요.”

신발끈이 한 번에 묶이지 않았다. 허리를 숙여 매듭을 다시 잡는 동안 얼굴에 열이 올랐다.

두 사람은 아파트 담장을 따라 걸었다.

처음 몇 분 동안은 별말이 없었다. 아주머니는 길가에 떨어진 은행 열매를 피해 걸었고, 윤희는 그 발을 따라 한 걸음씩 옮겼다.

바람은 생각보다 차가웠다. 나무에 얼마 남지 않은 잎들이 서로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아파트 창문마다 저녁빛이 달랐다. 어떤 집은 환했고, 어떤 집은 어두웠다.

“바람이 제법 차네요.”

윤희가 말했다.

“그러게. 그래도 같이 나오니까 안 빼먹었네.”

아주머니가 웃었다.

십 분이라고 했지만 한 바퀴를 돌고 나니 이십 분 가까이 지나 있었다. 두 사람은 별다른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헤어질 때 아주머니는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덕분에 걸었어요. 고마워요.”

집에 들어오자 화면 위에 문장이 떠 있었다.

‘계속 시청하시겠습니까?’

탁자 위에는 마시다 만 와인잔이 놓여 있었다. 방금 전까지는 그것만이 오늘을 끝내는 유일한 방법처럼 보였다.

윤희는 리모컨을 들어 화면을 껐다.

와인을 싱크대에 쏟아버리지는 않았다. 잔을 다시 들지도 않았다. 병 입구에 마개를 눌러 끼우고 냉장고 문 안쪽에 넣었다. 내일이면 다시 꺼낼 수도 있었다.

냉동실에서 밥을 꺼내 전자레인지에 넣었다. 기계가 낮게 돌아가는 동안 뒤집어 두었던 휴대전화를 들었다.

‘고마워요. 나도 이제 저녁 먹어요.’

문자를 보내고 나니 전자레인지가 울렸다.

윤희는 현관에 벗어둔 운동화를 신발장 안에 넣으려다 손을 멈췄다. 가지런히 방향만 돌려 문 옆에 두었다.

창문 틈으로 조금 전 걸었던 길의 찬 공기가 들어왔다.

하루를 마친 뒤, 내가 가장 먼저 찾는 쉼은 무엇인가?

오늘 내게 이미 와 있었지만 지나쳐버린 작은 돌봄이나 초대가 있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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