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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LAH STORY 001

남겨 둔 몫

바쁜 사람처럼 보여야만 자신의 자리를 지킬 수 있다고 믿었던 어느 저녁.

세탁소에서 밝은색 코트를 펼쳐 살펴보는 여성

오후 5시 42분.

세탁소 계산대 위에 놓인 수진의 휴대전화가 짧게 울렸다.

가족 단체대화방이었다.

“엄마 생신 저녁 7시. 식당 예약했어. 오늘은 내가 계산할게.”

오빠가 보낸 메시지 아래로 사진 한 장이 따라왔다. 창가에 화분이 놓인 작은 한정식집이었다.

잠시 후 메시지가 하나 더 왔다.

“수진아, 가게 때문에 시간이 어려우면 조금 늦춰도 돼.”

수진은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세탁소 안을 둘러보았다.

세탁기는 멈춰 있었다. 천장 옷걸이에는 셔츠 세 장과 바지 두 벌이 전부였다. 손님이 다녀간 지도 한 시간이 넘었다.

수진은 다시 휴대전화를 들었다.

“오늘 급한 주문이 들어와서 못 갈 것 같아. 엄마한테 미안하다고 전해줘.”

전송 버튼을 누르자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이제 오빠의 계산으로 밥을 먹지 않아도 됐다. 요즘 가게는 잘되느냐는 질문에도 대답하지 않아도 됐다. 새로 시작한 배달 세탁 서비스가 아직 주문 한 건 제대로 만들지 못했다는 사실도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그때 유리문이 열렸다.

한 여자가 밝은색 코트를 들고 들어왔다.

“혹시 이것, 내일까지 될까요?”

수진은 코트를 펼쳐 보았다. 손이 많이 가는 원단이었다. 평소 같으면 사흘은 필요하다고 말했을 것이다.

“네. 내일 오후에 오세요.”

대답은 생각보다 빨리 나왔다.

손님이 돌아가자 수진은 주문표 맨 위에 굵은 글씨로 적었다.

‘내일 완료.’

정말 바빠진 것 같았다.

잠시 뒤 아들이 세탁소로 들어왔다.

“엄마, 아직 안 갔어? 할머니가 기다리시는데.”

“엄마는 일해야 해.”

아들은 텅 빈 세탁 바구니와 방금 맡겨진 코트를 번갈아 보았다.

“이거 하나 때문에?”

수진은 코트의 단추를 풀었다.

“너는 아직 몰라. 돈 버는 사람은 가고 싶다고 다 가는 게 아니야.”

“내일 해도 되는 거 아니야?”

“내가 알아서 해.”

아들은 잠시 서 있다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할머니는 돈 벌어 오라고 한 적 없잖아. 그냥 엄마 오냐고 물어본 건데.”

그 말이 수진의 마음속 어딘가를 정확히 건드렸다.

“너까지 그런 식이니까 아직도 네가 그 모양인 거야.”

말이 나간 뒤 세탁소 안이 조용해졌다.

아들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입고 있던 점퍼의 지퍼를 끝까지 올리고 문을 나갔다.

수진은 붙잡지 않았다.

대신 코트 소매의 작은 얼룩을 세게 문질렀다. 한 번, 두 번, 세 번. 힘을 줄수록 얼룩의 가장자리가 더 번져 보였다.

휴대전화가 다시 울렸다.

아까 코트를 맡긴 손님이었다. 수진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곧 음성메시지가 도착했다.

“사장님, 아까 내일까지 되냐고 여쭤봤는데요. 급한 건 아니에요. 무리하실 필요 없고 다음 주에 찾아도 됩니다.”

수진은 메시지를 끝까지 듣지 않고 화면을 껐다.

‘무리하실 필요 없다.’

그 말조차 자신을 딱하게 여기는 말처럼 들렸다.

수진은 코트에 전처리제를 필요 이상으로 뿌렸다. 드라이클리닝 기계를 돌리고, 밀린 셔츠를 다리겠다며 스팀기까지 켰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기계에서 덜컹거리는 소리가 났다.

수진은 멈추지 않았다. 조금만 더 해두면 깨끗해질 것 같았다. 제대로 끝내기만 하면 오늘 가족 모임에 가지 않은 이유도 진짜가 될 것 같았다.

갑자기 세탁소의 불이 꺼졌다.

여러 기계를 한꺼번에 켠 탓에 차단기가 내려간 것이었다.

기계 소리가 멎은 자리에서 수진의 거친 숨소리만 들렸다.

그때 유리문 밖에 사람의 그림자가 비쳤다.

아들이었다.

그러나 아들은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문 앞에 종이가방 하나를 내려놓고 그대로 돌아섰다.

수진이 문을 열었을 때 아들은 이미 골목 끝을 지나고 있었다.

종이가방 안에는 반찬통 몇 개와 작은 보온병이 들어 있었다. 가장 위의 반찬통에는 마스킹테이프가 붙어 있었다.

삐뚤빼뚤한 어머니의 글씨였다.

‘수진 것.’

수진은 한동안 쪼그려 앉은 채 그 글씨를 바라보았다.

오빠의 계산도, 어머니의 기다림도, 아들의 말도 자신을 초라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이 오기도 전부터, 사정을 설명하기도 전부터 어머니는 딸의 몫을 남겨두고 있었다.

수진은 세탁소 안으로 들어가 차단기를 올리지 않았다.

먼저 고객에게 전화를 걸었다.

“제가 내일까지 해드릴 수 있다고 무리해서 말씀드렸어요. 원단을 상하지 않게 하려면 시간이 더 필요합니다. 괜찮으시면 다음 주까지 제대로 해드리겠습니다.”

짧은 침묵 뒤 손님이 말했다.

“그렇게 해주세요.”

전화를 끊은 수진은 아들과의 대화창을 열었다.

한참 동안 글자를 썼다가 지웠다. 왜 자신이 예민했는지, 요즘 얼마나 힘든지 설명하고 싶었다.

하지만 마지막에는 두 문장만 남겼다.

“아까 네 말을 듣지 않고 상처 줬어. 미안해.”

그리고 조금 뒤 한 문장을 더 보냈다.

“내일 할머니 집에 같이 갈 수 있을까?”

다음 날 아침, 어머니의 식탁에는 전날 남은 미역국이 다시 올라왔다.

어머니는 어제 왜 오지 않았느냐고 묻지 않았다. 그저 김치 접시를 수진 쪽으로 밀어주었다.

수진의 휴대전화에 가게 임대료 납부일이 다가왔다는 알림이 떴다.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다. 배달 세탁 주문은 여전히 없었고, 다음 달 매출도 알 수 없었다.

수진은 알림을 확인한 뒤 휴대전화를 식탁 위에 뒤집어 놓았다.

그리고 식기 전에 미역국을 한 숟가락 떴다.

수진이 돌아오기 전부터, 식탁에는 이미 수진의 몫이 남겨져 있었습니다.

나는 요즘 무엇을 해내야만 내 자리가 지켜진다고 믿고 있나요?

이미 내게 와 있는 사랑을, 초라해질까 두려워 밀어내고 있지는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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